"당신이 당신인 게 좋아요."
화가 영수(김주혁 분)는 동네 형 중행(김의성 분)으로부터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결혼까지 생각하는 여자친구 민정(이유영 분)이 어느 남자와 술을 마시다 크게 싸움을 했다는 말을 들은 것. 술 안 마시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는 영수와 그 약속은 없던 것으로 하자던 민정은 크게 다투게 되고 급기야 각자 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 후로 민정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영수는 민정이 있을 만한 곳을 애타게 찾아 나서지만 민정은 끝내 영수 앞에 나타나지 않는데.
홍상수 감독의 18번째 장편 영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이하 당신 자신)은 본인이 직접 목격하지도 않은 일을 당사자에게 말을 옮기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전개를 시작한다. 하루 술 다섯 잔만 마시기로 약속했으면서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그것도 자신이 모르는 남자와 술을 마셨다는 사실에 화가난 영수의 이야기가 영화의 시발점이 된다. 그 이후 영수가 민정을 찾아나서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의 끝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 영화의 주된 전개다.
이번 영화에서도 홍상수식 동어반복은 돋보인다. 늑대의 본심을 숨긴 지질한 수컷들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순진하면서도 여우처럼 은밀하게 남성의 마음을 홀리는 여성이 이들 중심에 등장한다. 술자리에서의 가벼운 진담과 의미 없는 농담 역시 기시감을 떨치기 어렵다. 그리고 '옥희의 영화'부터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등 작품에서 보여준, 규정되지 않은 시간의 흐름을 새로운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대개 작품에서 기시감을 주는 듯했던 홍상수의 동어반복은 이번엔 연남동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펼쳐진다. 이는 비슷한 패턴의 서사와 캐릭터를 답습하는 것 같은 홍상수의 영화를 새롭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실제로도 연남동이라는 공간이 연인들의 일상과 연애가 유기적으로 얽힌 공간과도 같은 만큼, 영수와 민정을 비롯한 친근한 관계 설정은 지극히 사실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홍상수 감독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민정이란 인물로 또 한 번의 변주에 성공한다.
민정이란 인물의 등장으로 영화의 서사를 다소 이성적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민정은 자신을 민정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말을 건 재영(권해효 분)과 상원(유준상 분)에게 "절 아세요?"라고 반문한다. 민정은 계속해서 자신을 아는 척하는 두 남자에게 단호하게 그들이 기억하는 민정이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이후 두 남자는 민정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술잔을 기울이게 되고 민정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45세 두 연상의 남자들을 귀여워 한다.
자신을 안다고 규정하는 남성들의 예상을 매번 뒤집는 여성의 모습은, '다 안다는 과신'에 대한 저항적인 메시지와도 맞닿아 있다. 이는 극적으로 영수라는 인물도 변화시킨다. 자신이 그간 만나왔던 민정이 그 누구든, 그의 소문이 어떻든, 민정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야겠다고 변화하게 된 것. 결국 영수는 민정에게 "당신이 당신인 게 좋아요"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술 마시는 문제로 다퉜던 당시 민정을 둘러싼 영수의 의심과 오해는 말끔하게 해소된다.
영화의 대사는 홍상수 감독을 둘러싼 불륜설 때문인지 일견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전작을 곱씹어 보면 새삼 새롭지 않은 대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자에겐 "예뻐요", 남자에겐 "귀여워요"라는 다소 투박하고 낯뜨거운 대사는 그간 홍상수 영화에서도 종종 등장해왔다. 재영은 "귀여워요, 머리가 하얗지만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민정의 말에 좋아 어쩔 줄을 모르고, 영수는 민정에게 "예쁘다"고 말한다.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도 경수(김상경 분)가 선영(추상미 분)에게 "선영씨가 얼마나 예쁜 사람인지 말하고 싶었습니다"라고 고백했던 대사가 등장했던 바 있던 만큼, 홍상수 월드에서의 황당한 고백도 여전했다.